여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분의 자녀가 되기로 한 크리스천 한 명이 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
그러하기에 삶에서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보여달라고' 기도한다.
하지만 기도할 때마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명확히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때면 그는 '이러다 내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결정을 하면 어떡하지?'하며 불안에 떨었다.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에 대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계실텐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은 내 믿음이 부족해서인가봐!'
이런 생각들로 인해 두려움이나 죄책감 같은 감정들을 느끼기도 한다.
이 이야기가 당신의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느끼는가?
그렇다면 Frank Viola의 책, 'Rethinking the will of God'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현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삶을 위해 하나님께서 훌륭한 계획을 세우고 계신다고 믿고 있다.
그것도 아주 세부적으로 말이다.
또 각 개인이 해야하는 모든 결정들 가운데 하나님의 완벽한 뜻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Frank Viola는 이러한 관점을 철로선에 비유 (Train track view) 하였다.
기차가 철로에서 벗어나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결정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두고 계획하신 내용에 큰 차질을 빚게 된다.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계획하고 계신데 그 계획에 빗나간 삶이라니... 생각만으로도 두렵다.
그러니 그 분의 뜻을 명확히 알아 결정에 실수가 없게 하고 싶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내 안에서 들려오는 기도응답의 소리를 알아차리기 위해 힘쓰게 된다.
환경을 통해 그 분의 뜻이 드러날 수도 있으므로 환경의 변화에 주목하며 그 의미를 알아차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모습들이 Train track view에 기반하여 하나님을 뜻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다.
현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이러한 교리에 갇혀 있으나, Frank는 이러한 교리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1. 이러한 교리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The doctrine has no biblical basis)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4가지 그의 뜻 (God's will)을 보여주고 계신다.
그러나 그 중 어떤 것도 train track view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
1. God's eternal will
이는 하나님께서 가지신 가장 중심적이고 궁극적인 뜻이다.
이 뜻은 창세 전부터 비밀로 감추어져 있던 것으로 전 시대를 아우른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은 하나님께서 그와 동일한 생명을 가진 존재 (교회)와 함께 영원한 교제를 누리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의 보혈로 교회가 생성되면서 감추어져 있던 비밀, 즉 그의 영원하신 뜻 (목적)이 드러나게 되었다.
2. God's sovereign (permissive) will
이 뜻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He is in control).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전지 = omniscient, 모든 것을 아심; 전능 = omipotent,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
He is all-knowing; He knows everything, before, during and after it happens.
그 말인즉, 모든 일들이 일어나기 전 그가 미리 아셨고, 그 일의 결과 또한 미리 아신다는 것이다.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허락하에 일어나는 것이다.
3. God's moral will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God's perfect will)이라고도 불리는 이 뜻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는 바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도덕적이고 온전하신 이 뜻은 모든 사람들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도덕적 뜻을 알 수 있도록 하셨다.
하지만 그의 sovereign 혹은 permissive will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거절할 자유를 허용하신다.
4. God's will in dispersing his gifts and callings in his church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되시고 교회는 그 분의 몸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지체를 이룰 여러 멤버들을 부르시고 은사를 나누어 주셨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부르심을 받거나 같은 은사를 선물로 받지는 않는다.
이렇듯 교회를 부르시고 세우시는 것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이 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된 나 바울은...' 이라고 얘기했을 때, 바로 이 뜻을 언급한 것이었다.
2. 이러한 교리는 살아낼 수 없다. (The doctrine is unlivable)
Train track view가 설파되어지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교리대로 살 수 없음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결정을 해야 한다.
그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가?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아침에 일어날 때 바로 일어날 지 혹은 모닝 알람을 끄고 좀 더 침대에서 뒹굴지 결정해야 한다.
침대의 어느 면으로 다리를 먼저 내릴지, 이를 먼저 닦을지 샤워를 먼저 할지, 혹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먼저 할지 결정해야 한다.
샤워를 하고 어떤 옷을 입을지, 어느쪽 양말을 먼저 신을지, 어떤 신발을 신을지, 아침은 먹어야 할지 말지, 먹는다면 뭘로 먹을지 등등...
아침에 벌어지는 상황에서만도 엄청나게 많은 선택의 순간이 있다.
우리는 이 때마다 하나님께 그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보는가?
그렇지 않다. 아니 그럴 필요성을 못 느낄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많은 부분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지도 않고 결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 그때마다 죄책감을 느껴야만 하는 것인가?
너무나 명백히 그렇지 않다 느낄 것이다.
3. 이러한 교리는 미성숙함을 장려한다.
저자인 Frank도 오랜시간 동안 하나님의 뜻을 train track view로 바라보며 지내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어리석은 판단을 하거나 이상한 결정을 하는 것을 보아왔다고 고백한다.
예를 들어,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거나 (이런 건 개인적으로 너무 비이성적으로 들린다), 성경책을 뒤적이다가 갑자기 멈춰지는 부분을 읽고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 이해하더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미성숙하고 어리석은 모습인가? (이런 것들을 Bible Roulet이라고 표현했는데 실제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러한 교리는 믿는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드온의 양털 뭉치 시험 (사사기 6장) 같은 것을 하게 한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면 이러라는 뜻으로 알고 저렇게 하시면 저러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그러니 환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십시요.' 이런 식이다.
즉, 내적으로 느껴지는 감명이나 혹은 외부적 신호들을 해독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어리석은 실수들을 하게 된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조금씩 다를 뿐, 이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취하는 근본 이유는 그들 모두 train track view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 이러한 교리는 거짓 죄의식, 두려움, 의혹, 그리고 혼란스러움을 야기시킨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놓치게 될까봐 전전긍긍한다.
이들은 그들이 구원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든 그들이 해야 할 것들을 초자연적으로 보여주시리라 믿는다.
이러한 교리는 본인이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안내를 명확히 느끼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게 만든다.
그 결과 종종 두려움을 느끼거나 자책에 시달리게 된다.
혹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했던 내적 영감이나 징후들이 오해였구나라고 판단되는 순간 혼란스러움을 경험하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거나 그의 자녀들을 돌보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게 된다.
실제 이런 과정을 겪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이들도 많다.
거짓 죄의식에서 벗어나려면 죄에 대해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죄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구약에는 여러 율법들이 명시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약에서 분명히 '사랑'이 모든 율법을 폐하셨다고 하셨다.
613개의 율법이 모두 하나의 명제 '사랑'으로 커버된 것이다. (마태복음 7:12; 22:36-40)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Love is the very nature of God)
사랑이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다.
사랑에 거한다면 죄에 거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를 살인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를 강간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가 가진 것들을 탐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에게 화를 내거나 저주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에게 거짓말하거나 속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를 낮게 여기거나 경멸하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진정한 사랑만이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바를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그러니 우리의 결정과 관련된 동기나, 의도, 목적, 태도등을 살펴 보았을 때 그것들이 사랑에 위반되지 않는다면, 죄를 짓는 것이라 할 수 없다. 반대로 사랑으로 행할 줄 알면서도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것은 죄이다.(야고보서 4:17 - 사랑이 죄의 기준이 됨)
그러므로 어떤 결정이 큰 틀에서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범주에 위배(사랑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라면 죄를 지은 것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런 결정에 대해 당연히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5. 이러한 교리는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이끄시는 방식과 일치되지 않는다.
성경에 예수님은 양치기로, 믿는자들은 그의 양들로 비유되어 있다.
양치기는 양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고, 적절한 경계선 (boundaries) 안에서 안전하게 풀을 뜯게 한다.
양치기는 늑대와 같은 위험이 있을 때 , 그 위험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한다.
양치기는 양들이 위험한 곳으로 가려고 하거나 길을 잃고 헤맬 때, 그의 지팡이를 이용하여 그들을 돌아와야 할 곳으로 인도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양치기가 그어 준 경계선 내에서는, 양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곳 어디서나 풀을 뜯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는 사실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같은 방식으로 자녀들을 인도하신다.
그는 그가 쳐 놓은 경계선 내의 푸른 초장에서 우리에게 자유로움을 허락하셨다.
다만 영적으로 더욱 성숙하여져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합하는 결정들을 내릴 수 있게 되길 바라신다.
시편 32:7-9
I will instruct you and teach you in the way you should go; I will guide you with my eye.
Do not be like the horse or like the mule, which have no understanding, which must be harnessed with bit and bridle, else they will not come near you. (NKJV)
내가 너를 훈계하며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가르치고 내 눈으로 너를 지도하리로다.
너희는 지각이 없는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의 입은 반드시 재갈과 굴레로 붙들어야 하나니 그리하여야 그것들이 네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지각이 없는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니 매번 하나님께 이게 맞아요? 저게 맞아요 물을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가르치시고 지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선택의 자유를 누리되,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분별하고 결정함에 있어 하나님 마음에 합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것이 영적으로 자라나는 것이며 그의 길을 이해하는 일에 있어 어른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14:20).
기차는 track을 벗어나는 순간 사고가 난다.
그리고 그에 따른 엄청난 댓가를 치뤄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진 track을 주셨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 노선을 벗어나는 결정을 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된다.
그러니 어떠한 자유도 누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에 따라 우리를 매 단계 인도하고 계신다고 보는 관점은 한편으론 우리를 안심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 모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로봇처럼 조정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는 창세기에서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허용하셨던 하나님의 모습과 상반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철로선 (train track)처럼 보게 하는 교리는 성경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또 우리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parking lot처럼 이해해 볼 수 있다.
주차는 주차장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주차장의 경계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분명한 boundary를 주셨다.
주차장 내에선 어디에라도 주차할 수 있듯, 하나님께서 주신 경계선 내에서 우리는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아담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하나님께서 주신 분명한 경계는 에덴 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를 제외하면 아담과 하와는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어떤 열매를 먹든지, 어떤 형식으로 먹든지, 언제 먹든지, 그 모든 행위에 자유함이 있었다.
그러니 어떤 일을 앞두고 선택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함을 누릴 수 있길 바란다.
우리가 고민하는 선택 사항들이 하나님께서 분명히 하지 말라고 하신 것들이 아니라면 어느 쪽으로 선택하든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선택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이 어떠하든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로마서 8:28) 약속하셨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온전한 기쁨을 누리고, 선택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길 바란다.
참고도서 Rethinking the will of God (Frank Vi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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